
오디오벡터 R10 Arrete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잖아
오디오벡터의 플래그십, R10 Arrete를 들으러 소리샵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청음회는 스피커도 스피커지만 기기에 가려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케이블도 호화스러운 구성을 자랑했습니다. 소리샵에서 취급하는 실텍과 크리스탈 케이블의 고급기들이 아주 가득하더군요. 여기에 보통 오디오숍 청음실 전경을 떠올리면 으례 시연하는 스피커들 좌우로 여러 스피커들이 함께 진열되기 마련인데, 오늘은 R10 아르떼를 제외한 다른 스피커들은 모두 측면 또는 후면으로 치워 두었습니다. 여러모로 청음 환경에도 신경을 많이 쓴 시연회였습니다.
오디오라는 것이 결국 매칭, 시스템 전체의 합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개인적인 궁금증은 R10 아르떼에 쏠려 있던 하루였습니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플래그십 스피커이기도 하지만 오디오벡터 스피커만이 가지는 독특한 포인트가 여럿 있기 때문입니다. 150cm가 넘는 장신의 스피커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폭은 호리호리합니다. 여기에 후면으로 갈수록 얄팍해지는 디자인은 또렷한 정위감을 중요시하는 스피커들에서 많이 보던 생김새입니다.

폭이 작기 때문에 정면에 직경이 큰 드라이버를 배치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보통 이런 경우 측면에 우퍼를 달아 두곤 하는데, 이 녀석은 측면이 아니라 후면에, 5인치 우퍼 드라이버 8개를 일렬로 세워 두었습니다. 사이즈보다는 숫자로 승부를 보는 셈인데, 이는 면적으로 따지면 15인치 드라이버와 맞먹는다고 합니다. 저역 하한이 21Hz까지 내려간다 하니 작지만 나올 것은 다 나오는 저역이라 하겠고요. 다만 면적이야 같더라도 실제 재생음을 따지자면 대구경 드라이버가 재생하는 저역과는 성격이 좀 다를 듯합니다. 후술하겠지만 실제 재생음도 호방함 또는 에너제틱함보다는 정밀함과 단정함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저역이었습니다.
정면 중앙의 똑같이 생긴 세 개의 드라이버 중 두 개가 로우미드, 한 개가 미드를 담당하고 그 위에 또 똑같이 생긴 AMT 드라이버 두 개가 각각 하이와 그 이상의 초고역을 담당하는, 5웨이 구조입니다. 덩치는 큰데 드라이버 직경은 큰 걸 쓴 부분이 없고, 또 여기에다가 대역도 제법 자잘하게 쪼개 놓은 데다가 고역과 초고역은 AMT를 썼습니다. 세상에 굉장히 다양한 스피커들이 있고 그 중에서는 이와 비할 것 없이 독특한 디자인, 설계의 스피커들도 많습니다만 R10 아르떼 역시 따질수록 그리 평범한 스피커는 아닙니다.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AMT가 담당하는 대역, 3K 이상 대역의 표현력이었습니다. 오디오벡터는 SEC라는 기술을 활용하는데, 이는 단순히 말하자면 AMT 드라이버 후면에 포트를 뚫어 놓는 것입니다. 보통 포트라 하면 저역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니 고역을 위한 포트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청음실에 도착하자마자 확인한 것도 이 부분이었습니다. 트위터 뒤쪽에 가만히 손을 대 보니 재생될 때마다 뒤편으로도 제법 기류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우퍼도 뒤쪽으로 설치해 두고, 트위터도 후면에 포트를 배치해 두고, 이래저래 스피커 뒤쪽 벽면의 컨디션도 중요해 보입니다. 여기에 정면에서 들을 때에도 타 스피커 대비 반사음 비율도 높을 것 같고요.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이런 독특함 때문에 청음회에 참석하기 전부터 과연 이 대형기가 어떤 무대를 형성할지, 공간감이 얼마나 넓게 펼쳐질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하자면 시연 초중반까지는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사실 후반부에 자리를 옮겨 앞자리에 앉아서 듣지 않았다면 오늘은 제가 후기를 남길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만큼 약 1.5미터의 전후 좌석 차이에 따라 소리가 극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먼저 제가 대부분의 음악을 감상했던, 뒷좌석에서의 소감은 장점과 단점이 매우 명확했습니다. 그리고 소리의 호불호를 떠나서 R10 아르떼의 소리 표현 방식, 나아가 추구하는 소리 성향은 뒷좌석에 앉았을 때에 더 잘 드러나는 면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넓고, 부드럽고, 잔향이 길게 이어지는 확산감이 좋은 소리였거든요. 마치 무지향 스피커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정면으로 쏘아지는 밀도 대비 측면으로 확산되는 소리의 존재감이 상당히 컸고, 덕분에 곱고 부드럽지만 음상 맺힘이나 음 하나하나에 실리는 에너지는 좀 떨어진다고 느껴졌습니다.
특히나 제법 긴 잔향 표현은 무슨 곡을 들어도 라이브 음원을 듣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침 또 청음회의 시작을 번스타인 곡들로 연달아 이어간 덕분에 대편성에서의 홀사운드를 제대로 맛볼 수 있기도 했습니다. 염두에 두고 들어서인지 무대 역시 좌우 측면뿐 아니라 스피커 뒤편으로도 제법 깊게 펼쳐지는 듯했고요. 이런 성향 덕분에 클래식, 라이브 공연처럼 개방감을 비롯한 홀사운드가 살아 있는 곡에서는 매우 잘 어울렸습니다. 다만, 그렇지 않은 곡에서조차, 잔향보다는 직접음의 에너지, 선명한 음선으로 표현되어야 할 곡들조차 조금은 힘이 빠진 것처럼 들려서, 장르와 취향에 따라 좀 많이 갈릴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악조건을 더하자면, 제가 앉은 좌석에서는 낮은 저역 일부 구간에서 제법 큰 부밍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가뜩이나 조금 부드럽게 들리는 저역이 부풀고, 여기에 다소 뾰족하게 들리는 중고역이 더해져서 리듬감 있는 현대 음악을 틀었을 때에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제 폰에는 '클래식에 특화된, 콘서트홀처럼 소리를 표현하는 스피커'라고 써 두고 메모를 마무리했습니다. 이러니 당연히 후기를 쓸 생각도 하지 않았고요.

남은 시간 편안하게 음악만 듣고 있던 도중 함께 듣던 한 분께서 앞쪽에 앉아서 들으면 전혀 다른 소리가 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혹시나 해서 마침 빈 앞좌석에 앉아 들으니, 웬걸, 지금까지 제가 들었던 소리와는 전혀 딴판의 소리가 들립니다. 아, 덩치는 큰 녀석이 자리에 굉장히 민감한 스피커구나 싶었습니다. 뒤에만 앉아 있다가 집에 갔으면 큰 오해를 할 뻔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R10 아르떼는 구조적으로 반사음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스피커입니다. 그러다 보니 룸 어쿠스틱, 그리고 좌석의 위치에 예민하게 반응할 만한 녀석이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오늘 들었던 청음실의 환경은 평소 익숙한 청음실들에 비해 조금은 라이브하게 느껴졌습니다. 가뜩이나 확산감이 좋은 스피커이니 더욱 잔향들이 난리를 칠 만한 환경이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에 아무래도 오디오벡터에서 상정한 직접음과 반사음의 교차 지점, 그 타이밍이 있을 텐데 그 구간을 벗어나면 또 정위감이 살지 않을 듯하고요.
뒤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단단한 음상들과 여기에 실리는 에너지, 원래 잘하는 확산감까지 더해서 굉장히 입체적인 소리가 납니다. 이렇게 들으니 앞서 들었던 단점들은 사라지고 장점은 그대로 살아서 이제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더군요. 스피커가 좌우, 그리고 뒤편을 잘 활용한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입니다. 다만 무작정 넓고 깊은 게 아니라 그 안에서 개개의 음상이 제대로 표현되어야 장점으로 부각되는 것이지 음상 표현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위 매가리 없는 소리처럼 들리기 십상입니다.
저는 청음회의 대부분을 후자에 가깝게 들었으니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을 수밖에요. 반면 앞좌석의 소리는 확실한 전자였습니다. 경험상 이 정도로 좌석 위치에 따라 소리 차이가 큰 경우는 하이파이 스피커보다는 프로 오디오 스피커 쪽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래서 뭐든 성급하게 판단하면 안 되겠구나, 오늘 또 하나 배워 갑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R10 아르떼 시연에서는 스윗 스폿에 앉아 감상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혹시나 다음에 소리샵에 방문해서 들으실 때에는 꼭 앞뒤로 옮겨 가며 최적의 자리를 찾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대로 자리를 잡고 듣는다면 하이파이 오디오의 덕목, 넓은 공간감과 입체적인 무대 표현, 그리고 정확한 음상에 적절한 에너지까지 두루 갖춘, 가격대에 걸맞는 고급진 사운드를 들려 주는 잘 만든 스피커입니다. 그 소리를 짧게, 몇 곡 듣지 못하고 자리를 마무리한 것이 아쉬운 하루입니다.

마지막으로 청음회 도중 잠시 진행한 재미있는 비교 테스트를 기록으로 남기고 유난히 실속 없는 후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R10 아르떼 후면에는 FGC라 하는 접지 단자가 있습니다. 스피커에 접지단이 있는 것도 특이하죠. 오디오벡터에 따르면 스피커 드라이버가 움직일 때 발생하는 잔류 전류를 바깥으로 배출시키는 용도라 합니다. 역기전력이든 와전류든 이론적으로는 스피커 구동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하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소리에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비교하기에는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R10 아르떼는 이 접지단을 연결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이걸 직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생각보다 확연하게 티가 납니다. 의도한 대로 접지단을 연결했을 때에는 좌우로 무대가 넓게 펼쳐지던 것이 접지단을 빼고 들으니 좌우 폭이 확 줄면서 소리가 앞으로만 쏟아집니다. 제가 뒤편에 앉아 들을 때였는데 원래 있던 저역의 부밍이 눈에 띄게 더 심해졌고요. 중역의 경우 앞쪽으로 보다 뻗어 나오는 편이어서 뒷자리 한정으로 나름의 장점도 있나 싶긴 하지만 원래의 스피커 설계 의도, 그리고 스윗 스폿에서의 청음 등을 고려하면 무조건 접지단은 연결하고 듣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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